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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기사

A01. [송창식의 자존심] 신문사 기고 칼럼

by 팬더54 2015. 1. 24.

글:    소리샘(김시우)

출처: 시애틀 7080 기타동호회

 

 

<송창식의 자존심>

 

 

 

 

작년 봄부터 이 칼럼을 집필하면서 가장 처음 선택한 가수와 소재는 '은희"와 그녀의 노래 "꽃 반지" 였다. 거기에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타를 배울 때 '양희은''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은희의 '꽃 반지' 가 교재로 많이 사용되었고 양희은보다 은희가 선배이기 때문에 그녀를 먼저 선택했던 것이다.

 

내 칼럼에서 7080 음악의 대표적 주자인 음악다방 세시봉에서 데뷔한 가수 조용남,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중에 주인공으로 모신 분은 조용남과 윤형주가 있었다. 김세환이 부른 토요일밤, 사랑하는 마음 등은 대학시절 기타를 치면서 참으로 많이 불렀던 노래인데 칼럼을 쓰기에는 솔직히 그 음악의 깊이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세시봉의 대표자로 인식되는 송창식을 이제서야 모시는 이유가 김세환의 그것과 사뭇 틀리다. 그의 범접하기 어려운 음악에 대한 경외감에 비해 나의 그것은 조족지혈이기 때문이다. 내가 감히 그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경거망동이라는 생각마저 들었고 처음 칼럼의 주인공으로 모시려고 했으나 2년 가까이 망설이고 있었고 그 두려움을 깨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내가 이렇게 음악 기획과 글 쓰기에 자신감을 얻어가는 과정에 많은 걸림돌이 있었다. 모든 게 그렇지만 글 쓰기도 슬럼프에 빠질 때가 있다. 어떤 주제를 설정해 놓고  기승전결을 엮어가는 과정에서 서너 줄의 한 단락 채우는 것에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고통의 순간도 맛보게 되는데 송창식을 논하고자 하는 지금이 그런 경우다.

 

연말에 많은 행사와 모임과 개인적으로 한 해를 돌아다보면서 통기타 축제를 준비하고 개최하면서 아내보다 더 많이 어루만졌던 기타를 잠시 뒤로 미루고, 칼럼을 쓰면서 아내보다 더 많이 바라보았던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회귀적 본능이 더욱 더 두뇌 회전을 더디게 하고 무력감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런 슬럼프에도 범접하기 힘든 나의 영웅 송창식을 모시는 것은,  취미로 하는 음악에도 지칠 때가 있고 회의감이 드는 순간에 소극적으로 절필을 하고 쉬는 것보다, 음악을 취미도 직업도 연예도 아닌 '공부'로 생각하고 평생을 살아왔다는 그 분을 통해서 적극적 명상과 수양의 시간을 갖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이 들었다. 음악과 마찬가지로 글은 나에게 명상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송창식은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아버지가 한국 전쟁에 나가 숨지고 어머니가 집을 나가는 바람에 누이동생과 함께 할아버지 밑에서 어렵게 생활했지만 음악에 대해서는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동네에서 나오는 소리란 소리는 다 듣고 따라 불렀다. 초등학교 전 과정 음악교과서는 입학도 하기 전에 모두 섭렵했다. " 초등학교 4학년 책부터는 콩나물 대가리 밑에 계명이 쓰여 있어 도미솔솔 하며 부르다 보니까 음계를 저절로 알게 됐다”는 게 그의 회고다. 아무에게도 배우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때 이미 악보를 읽고 채보를 할 수 있었던 것이 가능해졌다. 

그는 인천중을 졸업하고 서울예고에 입학했다. 지휘자가 되는 게 꿈이었으니 작곡과를 가고 싶었지만 작곡은 별도로 레슨을 받지 않고는 진학하기 힘들어 성악과를 선택한 후에 음악이 공부라는 것을 깨우쳤다고 한다. 문제는 돈이었다. 당시 서울예고는 학생이 각자 개인 레슨을 받고 그 레슨교사의 추천을 받아 학기말 실기시험을 보는 제도를 시행했다. 보통 가정에서 하는 레슨비가 1만원일 때 학교 레슨교사의 교습비는 1천원으로 상대적으로 저렴했지만 인천에서 서울까지 다닐 통학비가 없어 학교 창고에서 잠을 청하던 그로서는 이 돈을 마련할 수 없어  실기시험은 계속 0점이었다.

 

3학년이 되자 학교는 유급문제로 상의할 게 있다며 가정통지문을 보냈는데 이를 본 송창식은 말없이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후에 송창식은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닥치는 대로 살았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책을 훔쳐 헌책방에서 음악책이랑 바꿔보는 등 음악에 대한 열정은 놓지 않았다.  40일간 무전 여행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 살아서 뭐가 되겠나" 하고 절망할 때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을 새기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무의도에서 1개월간 생각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와 공사판 야간 경비를 했다.

 

낮에는 홍익대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러 놀러 가곤 했는데 그때 기타를 친구들에게 기타를 배웠다. 고등학교 때 배운 기초 음악 이론을 바탕으로 빨리 배웠다. 홍대 잔디밭에서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어느 날 대학생들이 모여서 노래를 부르던 세시봉 카페의  이상벽씨가 세시봉 주인 아들을 데려와 인사를 시키더니 홍대 대표로 나오라고 권유를 받았다.  얼떨결에 가짜 대학생이 된 송창식은 그렇게 공사판에서 무대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다.

 

당시 세시봉에서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은 모두 명문대생이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위축될 만도 하건만  그는 보통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자신감을 가졌다고 한다. 그가 어느 매체에서 인터뷰한 것을 옮겨본다.


“그런 것은 없었어요. 그때도 무게는 늘 나에게 있었으니까요. 저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16년 배우는 게 2년치 공부거리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요. 서울 음대에서 4년 배운 거, 내가 공부한 것보다 반도 안 되는 거예요.

대학 문턱은커녕 고교를 정상적으로 마치지도 못한 그가 어떻게 이런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까. 노숙자 생활을 3년 하면서 명상테크닉을 터득한 덕분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선뜻 납득하기 어렵지만 송창식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려면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바로 이것이 내 음악 인생에 혼란을 가져오는 시점에서 그들 선택한 이유다.

 

 

 

“사람이 추운 날 밖에서 자려면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숨을 작고 길게 들이마시고 내쉬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추우니까요. 그런데 그걸 한참 하다 보니 상상도 못한 일이 생겼어요. 우리가 컴퓨터 8이라고 치면 숫자 8이 그대로 입력되는 게 아니라 다른 기호로 기억되는데 컴퓨터 운영체계가 8이라 보여주잖아요. 우리 영육(靈肉)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라고 말하면 두뇌에 찍 금 하나 그어지는 건데, 몸의 운영체계에 의해 ‘아버지’라 나오는 거죠. 영육이 같은 체계가 아니면 언어가 안 통합니다. 그런데 명상을 하면 그 소통법이 생겨요. 어느 순간 지식이 몸 속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뭔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이 나오는 거예요. 처음에는 내가 머리가 좋아서 그런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전혀 배우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난 아직도 전술한 그의 회고가 피부에 닿지 않아 고통스러울 지경이다. 가짜 대학생이라고 스스로 말해버리고 스스로 명상 소통법을 깨우쳤으니 학벌 좋은 친구들이 오히려 가소로워 보였을 것이고, 명문대 학생이라고 해서 선망의 눈초리로 볼 턱이 없다. 이렇게 보면 세시봉의 맡형인 조영남이 당시 송창식을 가리켜 “정체불명의 대화 불통 상대”였다고 한 말이 이해가 간다. 이때 익혔다는 명상테크닉은 송창식의 음악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가 트윈 폴리오 때의 팝송을 버리고 전혀 다른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 게 이 명상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음악인이기 이전에 철학자라고 서두에 지칭한 이유다.

 

그의 인생과 노래 속에는 우리들의 지난 과거와 추억들이 고스란히 녹아있으며, 노래 한 곡 한 곡마다 깊은 철학과 사상이 담겨져 있다. 지독하리만큼 노력파이지만 태생적으로 천재적인 음악성까지 타고난 덕에 그의 음악적인 완성도는 가히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그는 틈틈히 작곡한 2천 여 곡을 세상에 내 놓지 않고 있다. 아직 완성이 안되었다는 이유에서다. 그가 공연을 하지 않는 이유는 마음에 드는 밴드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편 혼자 통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는 공연도 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에 노래에 비해 기타 실력이 형편없기 때문이라고 하니, 세시봉 그룹 중에 유일하게 3핑거링 주법을 연주하는 그의 주법을 따라 공부했던 나는 혼란스럽기 그지 없다.

 

유행가처럼 잊혀진 일부 가수조차 내면을 들춰내면 나름 상당한 자부심과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가왕(歌王)의 칭호를 받는 조용필을 대적한 유일한 사람으로 지목되는 송창식같은  거장의 내면은 파고 들면 들수록 알듯 말듯 오리무중인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에 대한 자료를 준비하면서 내가 초,,고교 시절 교과서 만큼 위인전과 교양서적을 많이 읽었고 대학시절과 지금까지도 한 달에 한 권 이상 각 분야의 책을 읽는다고 해서 꽤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단 것이 부끄러웠고, 가끔은 음악 인생에 대한 지루함과 회의도 느끼는 평범한 나 같은 사람이 그를 이해하는 것도 힘들데, 그에 대한 충분한 연구없이 이같이 글을 쓴다는 것은 만용이고 그에 대한 모독인 지도 모른다.

 

외국에는 이미 대중음악가에 대한 음악적, 사회적 연구를 체계화시켜 학문으로 발전시킨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비틀즈 학'은 이미 '비톨로지'라는 이름으로 전문화된 지 오래고, 마돈나의 경우 그녀 자체가 하나의 학과목으로 정해져 있는 대학도 있을 정도이다. 이는 현대 문화계에서 대중문화의 비중이 날로 커지고 있고, 대중 스타는 그 당시 사회의 산물이자 특정 장르가 아닌 대중문화와 미디어의 유기적인 관계에 의한 결과물임을 생각해 봤을 때 당연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특유의 연예인 경시풍조로 인해 이런 시도는 아직 우리나라에서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부터 <송창식학 개론> 이란 대학 교재를 저술한다는 각오로 그를 연구할 것이다. 그런 연구 결과로 천재성을 타고났지만 자만하지 않으며 오로지 노래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그의 인생 여정을 따라잡고 그의 그림자만 밟는 것만으도 영광이겠다.

 

칼럼 마감일을 하루 남기고 서재에 들어가 책상에 앉기 전 창문의 커튼을 열어 젖히니 바람 때문에 나뭇잎에 비가 머물 시간이 없이 떨어지고 있다.  지루하고 긴 시애틀의 겨울이 이어지고 있다. 차라리 눈이라도 왔으면 겨울 분위기에 젖어 토요일 거리 캐롤 공연만이라도 기분이 날 텐데 쓸쓸한 가을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비만 추적거린다. 대학 시절 같은 음악 서클에서 활동했던 친구들이 내년 봄에 나를 보러 시애틀에 들린다는 연락을 받고 마음이 설레는 오늘은 송창식처럼 그 친구들과 함께 캠퍼스에서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막걸리 기울이면서 입에 거품을 물고 주절댔던 개똥 철학조차 그리워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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