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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기사

[어록] 송창식어록01

by 팬더54 2008. 11. 11.


1. 한창 때 무려 20장이나 되는 음반을 내놓았지만 솔직히 그때마다 단 한번도 앨범이 ■괜찮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항상 부족하고 불만스러웠지요. 
( 2002.10.06 신동아와의 인터뷰 중 "일각의 얘기처럼 음반회사에서 앨범 출반을 주저하는 건가요. 왜 독   집 앨범을 내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자 )

2. 지금도 내 곡에 만족스럽지 않은 건 마찬가지죠. 음반 발매를 위해 곡을 쓰려고 책상머리에 자리하면 아득하고 혼미스럽기만 해요. 인기나 판매량과 같은 이윤동기는 이제 내게 의미가 없어요. 만약 내 작품에 만족한다면 당장 앨범 출반이 가능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써놓았던 곡들은 하나도 수록하지 않을 거예요. 모두 새로 쓸 겁니다. 
   ( 2002.10.06 신동아와의 인터뷰 중 )
 
3. 만약 내 작품에 만족한다면 당장 앨범 출반이 가능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써놓았던 곡들은 하나도 수록하지 않을 거예요. 모두 새로 쓸 겁니다. 
   ( 2002.10.06 신동아와의 인터뷰 중 )


4. 남들도 날 모차르트라고 불렀고 나도 스스로 모차르트라고 생각했다 
   ( 2002.10.06 신동아와의 인터뷰 중 인천중학교 재학 때에 대해 )
 
5. 고교동창이 홍익대 미대로 진학해서 나도 덩달아 홍대에서 살다시피했어요. 수업도 듣고 교정잔디에서 매일 기타를 퉁겼으니까요. 그러다가 세시봉의 MC로 활약했던 홍대 공예과 2학년 이상벽이 출연을 섭외해 얼떨결에 ■홍대 대표■로 출연하게 된 거예요. 나한테는 인생의 커다란 전기였지요. 거기서 연세대에 다니고 있던 윤형주와 이익근을 만나 ■세시봉트리오■를 만들었거든요. 
   ( 2002.10.06 신동아와의 인터뷰 중 )
 
6. 오페라를 한 것은 클래식밖에 몰랐기 때문이죠. 그때까지는 제게 클래식이 전부였어요. 
   ( 2002.10.06 신동아와의 인터뷰 중 )
 
7. 무엇보다 제 가슴을 흔들어놓은 것은 ■배운 대로■ 해야 하는 클래식과 달리 대중음악은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무렵 가요계는 트로트 아니면 약간은 변형된 서구 팝이 지배하고 있었던 시절 아니었습니까. 통기타 포크는 그것과 달랐지요.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것, 상상만 해도 얼마나 흥분되고 즐거운 일입니까? 전 어렸을 때부터 그런 점이라면 대놓고 끌려다녔던 사람이었습니다. 
   ( 2002.10.06 신동아와의 인터뷰 중 )
 
8. 한대수가 출현한 뒤 자극 받아서 내가 싱어송라이터로 전환하게 됐다는 말은 전적으로 틀린 얘기예요. 내 맘에 들지 않아서 그렇지, 난 이미 곡 쓰는 데 자신이 있었어요. 
   ( 2002.10.06 신동아와의 인터뷰 중 )
 
9. 제가 1973년 병무청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제 음악을 찬찬히 되돌아볼 시간을 갖게 됐습니다. 비교적 객관적 입장에서 나를 보게 된 거죠. 그랬더니 내가 만든 음악이 너무나도 형편없게 느껴졌습니다. 노래만 따지더라도 ■아마추어 국악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여학생보다 내 노래가 못하더라■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졌습니다. 정말로 창피했고 그동안 허송세월을 보냈다는 것이 분하기까지 했습니다. 자괴감에 군 복무 3개월 내내 눈물로 지샜어요. 
   ( 2002.10.06 신동아와의 인터뷰 중 )
 
10. 제대한 후 작심하고 내 음악체계 모든 것을 바로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음계, 소리, 화성학 체계를 위시해 음악 전반을 다시 연구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음악■, ■한국인 송창식, 내 속의 것■을 해야 한다는 자각에 이르렀지요. 
   ( 2002.10.06 신동아와의 인터뷰 중 )
 
11. 10년이 지나 트윈폴리오를 재결성했지만 그 차이로 인해 짜증이 날 정도였어요. 솔로로 열심히 음악을 했지만 대중들은 저와 트윈폴리오를 함께 기억하고, 때로 트윈폴리오를 나보다 더 기억에 두고 있다는 사실도 저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 2002.10.06 신동아와의 인터뷰 중 )
 
12. 맹세코 전 대마초를 한 적이 없습니다. 동료 뮤지션들이 설령 피울 때도 난 빠졌고 도리어 그들에게 ■언젠가는 큰 일 터질지도 모른다. 하지 않는 게 좋다■며 충고도 할 정도였으니까요. 
   ( 2002.10.06 신동아와의 인터뷰 중 )
 
13. 1975년 가수왕이 된 뒤 가수 정훈희와 동거설이 퍼졌고 대마초 혐의를 받은 정훈희와 덩달아 묶여서 수사대상에 오르게 됐습니다. 취조를 받는 가운데 자연스레 동료 이름을 거명하게 됐고 윤형주에 대해 묻길래 ■그 친구는 대마초 하지 않았을 거다■라고 답하는 와중에 저절로 주소를 알려준 꼴이 됐어요. 취조기술에 내가 말려든 겁니다. 더욱이 나중에 알았지만 취조실에는 신문사 기자가 있었어요. 다음날 기사를 통해 나는 졸지에 동료 가수들에 대해 불어버린 밀고자가 돼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가수들은 나만 보면 눈을 부릅뜨곤 했지요. ■망할 놈■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때의 황당함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 2002.10.06 신동아와의 인터뷰 중 )
 
14. 노래들은 내 소리를 낸 것이지 시대와 대치하는 어떤 메시지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항성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냥 그때의 내 음악이었을 따름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전 저항가요에 약간은 부정적입니다. 
   ( 2002.10.06 신동아와의 인터뷰 중 )
 
15. 음악가는 음악이 우선입니다. 사고와 고민 그리고 시대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 그 모든 것을 음악이란 그릇에 용해시켜야 합니다. 저항운동을 위해 음악을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위험하죠. 
   ( 2002.10.06 신동아와의 인터뷰 중 )
 
16. 내 곡 중에 김민기가 쓴 ■강변에서■가 있는데, 김민기 곡이라 그런 건지 운동권에서 많이 불려지더라고요. 그래서 전 몇 년간 일부러 그 노래를 부르지 않았어요. 
   ( 2002.10.06 신동아와의 인터뷰 중 )
 
17. 전 트로트도 많이 불렀고 트로트가수인 김연자씨에게 ■당신은■이나 ■안돼■ 같은 곡을 주기도 했어요. 내 노래 가운데 ■토함산■ 같은 곡은 사실 트로트를 만들겠다고 만든 곡이에요. ■피리 부는 사나이■도 그렇고요. 단지 ■트로트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시범의 의미를 담았을 따름입니다. 
   ( 2002.10.06 신동아와의 인터뷰 중 )
 
18. 음악은 다 똑같은 겁니다. 자전거의 따르릉 소리부터 바흐까지 다 같아요. 트로트가 단순히 반복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분명한 음악적 표현입니다. 단지 트로트가 경시되는 이유는 가수들이 음악 외적(外的)인 부분에 더 신경을 쓰기 때문이겠지요. 
   ( 2002.10.06 신동아와의 인터뷰 중 )
 
19. 한국인으로서 한국 고유의, 전통의 음을 찾는 것은 의당 제가 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 2002.10.06 신동아와의 인터뷰 중 )
 
20. 내 음악이 독특하다고들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비애스러운 일입니다. 나는 단지 우리 소리를 살펴 찬찬히 풀어놓은 것일 뿐이니까요. 결국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외면했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낯설어하게 된 것이겠죠. 그러니까 제 음악이 그때 사람들에게 새로웠을 겁니다. 전에는 그런 노력이 없었으니까요. 
   ( 2002.10.06 신동아와의 인터뷰 중 )


송창식 어록 [ 출처: http://www.eorok.com ]
**어록 닷컴애 올라와 있는 내용을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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