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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기사

A02. [송창식을 배신하지 않은 음악] 신문사 기고 칼럼

by 팬더54 2015. 1. 24.

글:    소리샘(김시우)

출처: 시애틀 7080 기타동호회

 

<추억의 7080 음악여행>

 

송창식을 배신하지 않은 음악

  

 

 

 

 

 

 

추억의 7080 음악여행

 

송창식을 배신하지 않은 음악

 

가정 대소사와 연말 모임 등으로 무리를 했더니 컨디션이 말이 아니다. 침 넘기다가도 사래가 걸려 기침을 하기도 하고 히터가 만들어낸 건조한 집안 공기는 아침에 통화하는 친구가 감기 걸렸냐고 물어볼 정도로 목을 잠기게 한다. 날씨와 환경 탓이려니 했는데 내 나이를 생각하니 피해갈 수 없는 노화현상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노래로 먹고 사는 가수는 아니지만 노래 없이는 못 사는 사람이라서 목 건강을 잃을까 은근히 걱정이 된다.

 

인터넷 자료를 뒤적여보니 목소리 관리 요령 중에 하나가 너무 노래를 많이 부르지 말라는 것인데 그 기준이 모호하다. 어떤 이는 20분 노래하고 10분 정도 쉬라고 하고, 어떤 이는 목청을 트이기 위해 30분 이상 노래하라고 한다. 그런데 송창식은 하루에 3시간 이상 노래 부른다고 하니 목소리 관리 요령은 본인의 건강과 여건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게 된다. 나도 매주 두 번 동호회원들에게 기타와 노래를 가르치고, 매주 출강하는 실버대학, 문화대학과 개인적 초청 강의를 포함하여 한 번에 3시간 넘게 목을 혹사할 때가 때가 적지 않다.

 

내가 행하고 있는 목 관리요령 몇 가지 소개한다. 잠 자리에 들기 전에 침실의 가습기를 작동하여 적정한 습기를 유지하고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냉수 한 컵을 마시고 조간 신문을 가지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몸을 가볍게 한 후 샤워 부스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허밍으로 흥얼거리면서 몸을 정결히 한다. 그러면 더운 물의 수증기가 입안과 기관지를 촉촉히 적셔주게 된다.  이후에도 보리와 옥수수로 우린 물을 수시로 마신다. 피부와 마찬가지로 기관지와 성대도 수분을 계속 공급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매일 아침 체육관에 가서 운동할 때는 입안이 마르지 않도록 코로 숨을 들이 쉬고 입을 뱉는다. 이렇게 하면 목 건강은 물론 신체 전체가 건강해서 긴 호흡이 필요한 노래도 잘 하게 된다.

 

지난 주에 언급한 바와 같이 가왕 조용필을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송창식은 제자리에서 맴도는 그 만의 운동 방법으로 건강을 지킨다고 한다. 조용필이 가요 대상을 싹쓸이 한 후 더 이상 가수상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자신의 길을 갔듯이 송창식도 그 이후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과감하고 실험적인 음반과 작품을 발표했다. <토함산> <가나다라> <에이야홍 술래잡기>와 같은 곡들은 전통음악에 대한 고민을 담아낸 곡으로, 김민기가 제시했던 전통음악의 현대화라는 화두를 김민기보다 높은 수준에서 보여줌으로써 한국 퓨전음악의 선구자가 되었다.

 

송창식은 또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75 <왜 불러>로 가요계의 정상을 계속 유지했고 1975년 말 연예계 대마초 사건으로 인기가수들이 초토화된 가요계에도 살아남아 1976년 말에도 양대 방송국의 가요상을 받음으로써 살아남은 자의 영광을 누렸다. 그와 동시에 <사랑이야> <슬픈 얼굴 짓지 말아요> <우리는> <푸르른 날> 등 대중성과 음악성을 동시에 갖춘 작품으로 대중들의 사랑도 놓치지 않았다. 1987년에는 우리 동호회가 주최한 시애틀 통기타 축제에서도 한 회원이 불렀던 노래인 <담배가게 아가씨>는 블루스, 국악, 대중음악의 어법이 그의 특유의 해학성 높은 가사와 어우러져 천의무봉(天衣無縫)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나만의 음악실을 가지고 있는 것에 행복하다. 나는 이곳에서 혼자 곡도 쓰고 가사를 붙이기도 하고 녹음도 하고 교습생들이 찾아와 가르치고, 회원들은 물론 친구들도 지나가다 들리는 동네 사랑방이다. 주거의 안전(?)을 방해 받는다고 아내에게 핀잔을 받기도 하지만 집 근처에서 차로 30내 거리에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이 만한 아늑하고 편안한 곳을 찾지 못했다. 2-3천 불의 임대료를 소비할 바에는 그 돈으로 음악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재단을 만드는 게 더 보람 있고 가치가 있을 게다. 그 사랑방은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으로 위로 받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하고, 어떠한 시름도 미움도 원망도 후회는 없는 곳이며 안방 침실보다 더 아늑하고 편안한 나의 보금자리이다.

 

그 사랑방에는 학창시절에 용돈만 생기면 사두었던 LP판이 겹겹이 쌓여있고,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허리가 휜 노인처럼  목이 휘어 제대로 소리를 못 내는 통기타지만 그 통 안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담겨져 벽에 기대져 있다.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송창식의 작업실 한구석에도 오래된 LP판들과 줄이 끊어진 통기타가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송창식은 퇴촌의 집에서 구리 작업실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퇴근을 한다. 송창식이 작업실에 도착하는 시간은 저녁 8~9시다. 아침에 출근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한창 활동할 때는 통행금지 시간 이후 밤늦게 노래하고 작곡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게 습관이 돼서 지금까지 낮과 밤을 거꾸로 살고 있다고 한다.

 

                                 


저녁에 작업실에 도착해 3시간 정도 연습을 하고, 다시 퇴촌의 집으로 돌아가 이것저것 하다가 아침 6시나 돼서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그의 기상시간은 오후 2. 일어나서 화장실에 앉아 책을 보고,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저녁 6시경에 집에서 나와 다시 구리의 작업실로 향한다고 한다. 난 이런 그의 일반적이지 못한 일상으로 결혼생활이 가능한지 과연 결혼은 했는지, 했다면 그 결혼생활이 지속이 될 수 있는지, 그렇지 않아도 독신주의자를 자처했던 그였기에 현재의 그의 결혼 생활이 궁금해졌다.

 

1977년 무렵 30살이었던 그가 어느 날 느닷없이 연인을 공개하고 결혼 선언까지 했다.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 때의 그 여인은 나이가 한 살 아래인 서울 예고 동기 동창 한성숙이었다. 학교 졸업 후는 서로 인연이 없었다. 송창식은 음악과를 다녔고 한성숙은 미술과를 거쳐 우석대 메이퀸 출신인데 서로 만나지 않고 지내다가 우연히 연말 모임에서 만나 그 자리에서 결혼을 약속했다고 하니 보통 인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 때 송창식은 어떤 기자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 ‘작년(1976) 12 25일 저녁 <그대 있음에>의 쫑파티(송별연) 때 어떤 역술인 할머니가 나에게 그랬어요. 당신 장가 안 간다는 것은 거짓말이야. 금년 안에 결혼 상대를 만나겠는데 바로 결혼하겠구먼 하고 큰소리를 쳤어요.’ 새해까지 남은 날짜가 6일인데 믿을 수 없어서 허허 웃고 말았다는 송창식. 그런데 그게 바로 족집게 예언이었다.

 

그로부터 6일 후인 12 31일 밤 동창모임에서 그는 우연히 한성숙을 만나 그 자리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15일 뒤 부산에 사는 색시 어른들을 찾아가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결혼 승낙을 받는 과정에서 송창식의 행동도 기발했다. 술 한 병 차고 들어가 넙죽 큰 절을 올리고는 ‘따님과 결혼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하고 간청을 하자 어리둥절한 예비신부 아버지는 ‘언제부터 사귄 건지 모르지만 너무 빠르지 않느냐’고 답했다. 이때 나온 사윗감의 응답이 걸작이었다. ‘좋은 남편 노릇은 못할지 모르지만 좋은 사위 노릇은 하겠습니다’라고 했다는데 어쨌든 사업가로 통이 넓었던 신부 아버지는 기꺼이 송창식을 받아들였고 한다.

 

이처럼 그는 음악 생활은 물론이고 평상시 생활에도 그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의 시선에 송창식은 이렇게 항의(?) 했다. " 다른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과 하찮은 일이 제게는 그저 똑같은 일이거든요. 만약 방송 출연 섭외가 왔는데 친구와 선약이 있잖아요. 그럼 섭외 PD에게친구랑 약속이 있다고 거절하거든요. 그럼 주위 사람들이 난리가 나요. 친구는 나중에 만나고 방송을 먼저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요. 하지만 저한테는 세상 사는 일 중에 특별히 중요한 일이란 건 없어요. 그저 누가 먼저 약속을 했느냐가 중요하지.”

 

에 대한 개념 역시 그를기인으로 불리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그에게이란 그저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 쓰는 문제일 뿐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 많은 돈을 벌고 싶지도 않다. 사람들은 그에게 가난하다고 하지만, 정작 그는한 번도 돈이 모자라거나 가난했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사는 데 꼭 필요한 부분에서 돈이 없다면 불편하겠지만 집 있고 차 있고 입을 옷과 먹을 게 있는데 더 필요한 게 뭐냐는 것이다. 음악을 하는 데 필요한 좋은 기타도 돈이 있으면 구입하지만, 만약 돈이 없다면 갖고 싶어 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것. 그는 한평생소유욕이란 걸 모르고 살아왔다고 한다. 내가 웬만한 승용차 값에 버금가는 꿈에도 갖고 싶었던 Martin D-40 기타를 사기 위해 "기타가 몇 개인데 또 사냐? 차라리 그 돈을  차를 바꾸라"고 했던 아내의 성화를 잠재우고 결국 손에 넣었던 일을 생각하면 프로 가수임에도 나와, 아니 일반 사람들과 사뭇 다른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그를 제대로 알고 그의 공연 실황을 보니 늘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해탈의 모습이 읽어낼 수가 있었다.  그는 한평생 집 한 칸도 없이 살다가 이사 다니기 귀찮아서,  생애 처음으로 경기도 퇴촌에 집을 지어 정착했다. 방송에 출연했을 때는 물 위에 집을 지었다고 알려져수상가옥이라는 소문이 났지만, 개울 옆에 집을 지었을 뿐이다. 아내가 물을 좋아해서 개울가에 집을 짓게 된 것이라는데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도 엿볼 수 있다. 사랑에는 기인 송창식에게도 비범하지 않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 트레이드마크인 송창식. S 방송 프로그램에서 L사회자가 그에게화는 낼 줄 아세요? 누군가와 싸움을 해본 적은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송창식은 전 화를 낼 때 굉장히 열심히(?) 화를 냅니다. 열심히 화내지 않으면, 상대방이 제가 화가 났다는 걸 모르니까요. 다만, 제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없을 정도로 화를 내지는 않아요." 라는 의외의 답변을 했다. 또 그는포커 페이스에도 능하다고 했다. 웃으면서 화를 낼 수도 있고, 슬픈 걸 웃음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고. 웃는 얼굴이기 때문일까. 고단하고 힘들었던 생활고에도, 그는 평탄한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6·25전쟁 때 빈털터리로 거리에 나선 후, 가난에 찌든 고달픈 삶이 계속됐고, 노래를 시작하기 전까지 3년 동안 노숙을 하기도 했다는 송창식의 고뇌를 찾아볼 수가 없다. 돈이 없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하여 공사판을 전전하고 무전 여행을 했던 송창식은  그때 그 시절이 그냥 좋은 추억 같다고 한다.

빈털터리 노숙 생활을 회상하며죽도록 힘들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할 법도 한데, 송창식은 그저 인생의 한 시절그런 일이 있었다는 정도로 편하게 이야기한다. 이런 그의 무던한 성격은 웃으면서 살아온 내공 덕분일 것이다. 40년의 긴 세월 동안 돈과 명예에 대한 소유욕을 모두음악에 대한 열정과 맞바꾼 듯한 그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여전히 행복해지는 이유는 웬만해선 닮을 수 없는 그의 삶에서 나오는 듯하다.  2주 동안 송창식의  음악 인생과 철학을 짚어보면서 음악은 가식 없는 진실과 순수한 열정을 가진 사람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그 꿈을 열어준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음악은 그 숭고함과 고마움을 아는 자를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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