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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기사

[기고] 송창식이 클래식이다(인물과사상 2007년 9월호)

by 팬더54 2008. 11. 19.


송창식이 클래식이다
 출처:    
http://blog.hani.co.kr/yucheol/5727




중학교 시절, 나는 나훈아를 좋아했었다. 내가 그의 노래를 알게 된 것은 소장수 아버지를 두었던 친구 때문이었지 싶다. 그의 집에는 당시 최고의 문화 히트 상품이던 야외전축이 있었다. 지금은 가사도 제목도 모두 잊었지만, 나는 친구와 나훈아의 노래를 야외전축에 걸어놓고 신나게 따라 불렀다. 시야에서 나훈아가 멀어진 것은 통기타를 배우면서 양희은, 조영남, 김세환, 윤형주, 김정호, 송창식 등이 부르는 포크송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한때나마 나훈아를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무척 당황했다. 사춘기 때라고는 하지만 내 미감이 그의 트로트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치한 자기 합리화를 시도했다. “나는 나훈아를 좋아했던 게 아니라 엘비스 프레슬리의 원색적인 몸짓 덕분에 인기를 얻었던 그의 영원한 라이벌 남진을 싫어했던 것”이라고 말이다.

내가 송창식을 처음 본 것은 지난 2006년 5월,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열렸던 ‘신세대 부모님들을 위한 효 콘서트 <2006 포크 빅3> 공연에서였다. 대중가수 콘서트를 최초로 관람한 것은 그로부터 1년 전인 2005년 어버이날 딸아이가 사준 티켓으로 구경한 양희은의 무대. <2006 포크 빅3> 공연 출연진은 송창식과 윤형주, 그리고 김세환이었으니, 나는 2년 사이에 내 젊은 날의 우상 네 명의 음악을 모두 접해보는 호사를 누렸던 셈이다. 두 번에 걸쳐서 본 포크송 공연은, 자녀들로부터 효도의 뜻으로 받은 공연에 참석할 만큼 내가 늙었다는 것, 그리고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이 50대 이상의 ‘노땅’들이라는 것이 주는 어색함을 제외한다면 매우 유쾌한 추억이었다. 그 중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가수는 송창식이었다. 양희은은 양희경과 풀어내는 감동적인 삶의 가족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공연 후반부로 가면서 노래의 완성도가 다소 떨어졌던 게 아쉬웠고, 그런 아쉬움은 음악적 내용에서 다소의 차이는 있었지만 윤형주나 김세환에게서도 발견되었다. 

송창식은 달랐다. 세 번째 스테이지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가 내뿜는 사운드는 공연장을 일순간 뒤바꿔 놓았다. 그의 목소리는 관객을 들었다 놓았다 했고, 그가 만들어 내는 음악은 절정을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송창식의 노래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내가 듣기엔 그랬다. 양희은, 김세환, 윤형주가 좋은 가수란 사실엔 이의가 없지만 나는 그들의 목소리와 음악적 표현에서 어쩔 수 없는 나이의 흔적을 훔쳐 볼 수 있었다.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송창식의 열창을 들으면서, 나는 80년대 후반 TV를 통하여 우연히 보았던 그의 콘서트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도 나는 그의 노래에 압도당했다. 대중가수가 그토록 심오한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으니까. 당시 클래식계에서는 지휘자 번스타인이 피아노와 작곡, 그리고 지휘에서 보이는 천재성을 말하기 위해, 만약 그가 100-200년 전 태어났다면 충분히 쇼팽이나 베토벤 같은 인물이 됐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었다. 때문에 송창식의 노래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만약 송창식이 클래식을 전공했다면 정명훈이나 백건우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송창식은 클래식으로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 인천중학교를 다닐 때 자타가 인정하는 그의 별명이 모차르트였고, 3학년 때는 경기음악콩쿠르 성악부분에서 1등을 하였다. 어른들이 당시 명문이었던 제물포고등학교에 보내고 싶어 할 만큼 공부를 잘했지만 송창식은 성악전공을 위해 서울예고를 선택했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예고를 중도 포기해야 했으나 데뷔무대로 기록되는 무교동 음악 감상실 세시봉에서 송창식이 불렀던 노래는 도니체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에 나오는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었다.  윤형주와 결성한 트윈폴리오의 인기가 상한가를 칠 때, 송창식은 돌연 팀을 해체했다. 우리의 음악 내지 송창식 자신의 소리를 찾기 위해 음계, 소리, 화성학 체계를 비롯한 음악 전반을 다시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그 첫 결실이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였다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얘기. 

물론 내가 송창식을 좋아하는 이유가 그의 클래식과의 연관성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왜 불러’나 ‘고래사냥’이 독재정권에 의해 한 때 금지곡으로 묶였고, 그로 인해 대학생들이 유신시대에 대한 저항의 찬가로 그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는 사실도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니다. 박정희 정권의 말기였던 1978년에 불순분자에 다름 아니었던 김민기에게 대뜸 연습실을 내주는 위험을 무릅썼던 것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나는 그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래를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즐겨 불렀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리고 그것이 미덕이 되는 시대를 살면서도 자기 곡이나 가사에 의식적으로 저항성을 담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인간됨이 좋다. 그는 김민기 같은 “브람스 수준의 천재”가 저항가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였음을 못내 안타까워하지 않았던가. 지금과 달리 포크송 가수나 그들의 팬들, 그리고 국악계가 트로트를 천박하다고 괄시할 때, 트로트 가수 김연자에게 ‘당신은’ ‘안 돼’ 같은 곡을 주었고, 자신이 부른 ‘토함산’이나 ‘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트로트를 만들기 위한 곡이었다고 당당하게 털어놓았던 일을 기억하는 것도 즐겁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그의 음악 앞에서 깍듯한 예의를 표하고 싶게 만드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그의 태도다. 장인 정신이다. 임진모가 잘 지적했듯 송창식은 “언제나 음악의 근원을 면밀히 탐구”한 음악가였다. 나는 어설프게 1970년대라는 시대에 맞서거나 개입하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고 나름대로 음악의 근원을 사유했던 그의 태도를 높이 평가한다(그와 동시대를 살면서 시대에 맞섰던 민중 예술가들의 고난이나 참여를 폄하하자는 게 아니다). 그의 또 다른 음악적 태도는 냉혹할 정도의 자기 관리다. 그의 음악 인생 중에서 앨범을 홍보해 주겠다는 TV 출연 섭외를 거절했던 에피소드는 흔하다. 오전 5시 취침하여 오후 2-3시에 기상하고, 기를 통하여 자기 몸을 단련하는 일은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삶의 원칙이란다. TV나 라디오 출연을 극도로 자제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잊고 살지만 그는 2002년 현재, 그러니까 55살의 나이에 매년 10차례 정도의 콘서트를 소화하고 있다. 그는 15년 이상 독주 음반을 내지 않고 칩거하는 동안 1000여 곡을 썼지만, 때문에 자신만 마음을 먹으면 앨범을 내주겠다는 음반사는 줄을 섰지만 그 제안을 모두 뿌리 친 예술가다. 음악의 완성도가 담보되지 않는 한 가수로서의 인기나 음반을 통한 이윤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런 예술가 앞에서 어찌 예의를 잊을 수 있겠는가. 음악의 장르가 뭔 대수겠는가. 송창식을 생각하면 내 삶에 갑자기 생기가 돋는다. 그의 노래가 있어 나이 들어가는 게 덜 외로울 것 같기 때문이다. 내 나이 50이면 어떠랴, 이제라도 ‘담배가게 아가씨’에 당차게 도전해 봐야겠다. 

 


<인물과사상> 2007년 9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송창식-슈베르트자장가, 아베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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