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식-슈베르트자장가, 아베마리아
<우리는> 그를 국민가수라 불렀다
2년남짓 활동한 트윈폴리오는 윤형주의 학업문제로 팬들의 아쉬움속에 1969년 12월 종지부를 찍었다. 송창식은 70년 3월 MBC <목요살롱>에 '비야 내려라'를 부르며 솔로가수로 새출발했다. 이때 불렀던 노래들은 비틀즈의 LET IT BE를 번안한 '내버려두오'와 YESTERDAY 등 주로 팝송들이었다.
짧은 기간에도 불구, 폭넓은 대중적 사랑을 얻은 것은 타고난 노래실력외에도 여성취향의 달콤한 멜로디가 한몫 거들었다. 송창식은 한대수, 김의철, 김민기, 양병집 같은 우직하고 사회참여적인 정통포크가수는 아니었다. 누구나 쉽게 빠져들 수 있는 달콤한 사랑노래를 부르는 상업포크가수였다.
은유적인 저항적 노래가락에 공감하는 많은 정통포크팬들에 의해 그의 노래는 '인기에만 영합하는 측면이 있다'는 일부 비판도 받았다.
MBC라디오 <별밤>의 진행자 DJ 이종환은 자신이 제작기획을한 <별밤에 부치는 노래씨리즈>의 첫 주인공으로 주요게스트였던 송창식을 선택했다. 솔로데뷔음반 <송창식 애창곡모음-유니버샬,K-APPLE36,71년3월>은 1년여동안 불렀던 애창곡 모음집. 자작곡인 '창밖에는 비오고요'등 수록된12곡들은 대부분 애절하고 감상적 분위기의 노래들이었다. 최초의 여성트리오 김씨스터즈가 70년도에 이미 불렀던 <공화국의 전송가(Battlehymn of the republic)>를 <조국찬가>라는 제목의 애국가요로 다시불러 빅히트를 기록한 것은 의외였다.
이곡은 애국가요도 히트할 수 있다는 전례를 남기며 유행처럼 번졌다. 언론의 인터뷰요청과 TV와 라디오 방송출연 요청이 밀려들며 명동, 충무로의 살롱가에선 ‘여학생들에 생명적인 존재 송창식’이란 현수막까지 나붙는 등 요란했다.
그러나 송창식은 TV보다는 얼굴을 나타내지않는 심야라디오프로만을 고집해 <별창식> <밤창식>으로불렸다. 김희갑 작ㆍ편곡집으로 발표된 <송창식애창곡모음2집-유니버샬,K-APPLE56>엔 <비와 나> <내나라 내겨레> <송창식 자장가>등 창작곡이 3곡이나 수록되어 있다.
윤형주에게 먼저 선사했던 <비와 나> 그리고 김민기가 작사한 애국가요 2탄 <내나라 내겨레>는 지금껏 불리어지는 국민가요급노래. 애틋한 옛추억에 잠기게 하는 마력을 지닌 <상아의 노래>는 대학가는 물론 중고등학생들에까지 널리 불리어졌다.
2집발표와 더불어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온 <비의 나그네> <딩동댕 지난여름> <애인>등 주옥같은 노래들은 가히 송창식 돌풍을 일으켰다.
72년 6월 미국작곡가 벤 오클랜드는 내한중 우연히 파티석상에서 <세노야> <창밖에는 비오고요> 등을 부르는 송창식의 노래를 듣고 감탄했다. 송창식의 모든 음반을 구해 들을 만큼 매료된 그는 송창식의 미국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정상의 인기는 끊이지 않는 구설수를 동반했다. 루비씨스터즈의 전 멤버 주미옥, 인기정상의 TV 탤런트 한혜숙, 양정화와의 열애설, 홍콩배우 로리타와의 염문설도 그랬고 장사하러 나간다며 가출한 어머니의 느닷없는 등장 등 송창식은 때론 진실이 아닌 헛소문에 시달리며 일거수 일투족이 대중들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75년 8월 '독신으로 살며 음악에만 전념할 것'이라는 선언을 하면서 모든 스캔들의 종지부를 찍었다.
75년은 송창식의 가수인생중 최고의 해. 더욱 대중적인 음악적 변신을 감행했다. 이때 발표한 <고래사냥> <왜불러> <피리부는 사나이> <사랑하는 마음>등은 제10회 MBC10대가수가요제에서 그를 가수왕으로 등극시킬만큼 폭발적 반응을 불러왔다.
그러나 가요정화운동으로 <고래사냥> <왜불러> 정미조가 부른 <불꽃> 등 많은 곡들이 금지족쇄를 차기도 했다.
자작곡으로 발표한 <피리부는 사나이>는 박춘석의 69년곡 <산너머 우리마을>, <사랑하는 마음>은 미국가수 그린 리빙의 의 표절시비에 휘말리며 '너무 상업적으로 변신했다'는 일부 비판이 거세졌다.
송창식은 '75년은 내 음악을 이해해준 분들과 실망한 분들로 양분되어 얻은 것도 많고 잃은 것도 많은 한해였다'고 회고한다. 이후 5번의 예비군훈련 기피 혐의로 입건, 연예협회와 방송윤리위원회로부터 1년간의 방송출연금지를 당하는 아픔을 겪으며 대마초 파동에 연루된 조용필과 함께 은퇴의 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77년 9월 고교동창이자 스튜어디스 출신 쌍둥이 한성숙과의 결혼으로 송창식은 <속 별들의 고향> 영화음악 작곡에 전념을 하며 안정을 찾았다. 이 당시 군에서 제대, 완구공장 창고직원으로 일하다 해고당한 김민기에게 작업실을 거리낌없이 내줘 운동가 '공장의 불빛'을 탄생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트로트록으로 불렀던 '왜불러'가 79년 일본에서 음반으로 발매됐다. 이후 81년 우리가락에 심취하여 농악과 록을 접목한 <가나다라>를 발표하며 MBC인가가요차트 1위를 4주연속 차지하고 82년 제1회 가톨릭가요대상을 수상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미성이었던 목소리도 몸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한을 표출하기 위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창법으로 변화를 주었다.
단전호흡과 도사상에 빠져들며 화엄사로 들어가 독신수도생활을 시도하기도 했다. 82년 윤형주와 13년만에 트윈폴리오를 재결성, 음반을 발표하며 팬들의 향수를 달래주더니 85년에는 세계적인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에 의해 취입이 추진되었던 공전의 히트곡 <우리는>으로 5회 가톨릭가요대상을 재수상하기도 했다. 요즘 송창식은 서양의 달콤한 곡을 흉내내던 데뷔시절의 음악적 미숙함에서 탈피하여 도가사상과 우리가락에 심취해 자신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해 가고 있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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