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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소리샘(김시우)

출처: 시애틀 7080 기타동호회

 

<추억의 7080 음악 여행>

 

다시 살아난 중년의 열정

 

농부는 죽더라도 자신의 씨앗을 베고 죽는다”(農夫 餓死 沈厥種子)는 말이 있다. 얼핏 어리석고 인색한 사람이 죽으면 재물도 소용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책임을 다 한다는, 집념과 책임의 가치를 강조한 속담(俗談)이다.

 

지난 주 칼럼의 주인공이자 자유영혼의 천재 뮤지션 송창식은세상의 나쁜 것은 다 좋은 것이라고 했다. 모진 세상의 풍파를 온 몸으로 이겨 낸 자조(自照)의 말이다. 그는 아버지가  한국 전쟁에서 숨지고 어머니는 가출을 하여 조손(祖孫)가정에서 어렵게 자랐다. 음악뿐 아니라 공부에도 천재성을 타고 났지만 그의 가난은 그 창조성을 담보하지 못했다. 결국 가난으로 인한 고교중퇴, 떠돌이 생활, 공사판 경비를 하면서도 그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신념을 꺾지는 못했다.


살면서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절망, 절박, 절실함을 빗대어 목숨 줄을 놓아 버릴 만큼 분노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음악은 그런 순간에 태어나기도 한다. 나와 함께 음악 모임을 꾸려가는 사람들 겉으로 여유가 있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회원 중 백만장자부터 한 달 한 달 생계를 이어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 보면 사람은 모두 '거기서 거기'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래 전 서울의 모 호텔 사우나에 간 적이 있다. 잘 풀리지 않는 일을 잠시 접고 좀 쉬러 간 건데 웬 노인이 온탕 속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이상한 타령을 하면서 피곤한 내 귀를 거슬리게 했다. 못 마땅한 표정으로 곁눈 질을 하는데 그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 젊은이가 내가 불편한 모양이군" 하더니 근육 없이 축 늘어진 거죽만 있는 왜소한 몸을 드러내고 일어섰다. 나중에 탈의실에서 비서들이 그를 호위하면서 나가는 것을 보고 주위 사람에게 물어보아 그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 재벌기업 회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아버지의 강력한 권고로 군인이 되어  어깨에 번쩍이는 별을 다는 날을 꿈꾸며 풍운의 꿈을 꾸었던 청년 장교 시절을 지나, 김포에서 건축사업을 하면서 경리 직원과 밤 늦게 아파트 분양대금으로 들어온 수표와 현금을 셈하고 밤잠을 설치다가, 아침 일찍 은행에 입금한 후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면서 뿌듯해하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재물에 눈이 어두워 사업 규모를 확장하다 보니 동업자가 필요했고 승승장구하다가 IMF 구제금융이라는 복병에 발이 잡히기도 했다. 

 

미국에 와서 부동산 투자와 건축 사업만큼 수익이 큰 사업을 하려고 부지를 찾을 때 만난 부동산 에이젼트의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내가 직접 부동산 에이젼트가 되서 매물 정보를 얻으려는 생각에 1시간만 읽으면  뒷골이 당기는 건축, 부동산, 법률 서적을 6개월 공부하여 부동산 에이젼트 면허를 취득하고 부동산 회사에 입사했다. 집과 큼직한 가게를 2개 사고 팔면서 목돈을 좀 챙겼다. 빈 공지를 사서 건축사인 군대 동기와 임대 건물 건축과 판매 위임 받은 리스팅 중 하나인 개스 스테이션을 구입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을 하다가 후자를 택했다. 부동산 회사의 오너가 리스팅을 빨리 팔라고 독촉을 하여 내가 사버린 것이다. 그런데 개스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부동산 경기가 바닥으로 향해 곤두박질하고 있었다. 뒷북을 치고야 만 것이다. 더 손해를 보기 전에 처분하고 칩거생활을 했다. 그러자 내가 삼백만 불 사기를 치고 도망갔다, 한국에 갔다, 심지어 사고로 죽었다 라는 말이 빙빙 돌아 내 귀에까지 들어왔다.

 

내가 가족과 의식주를 영위할 만큼의 재물이 차면 그 나머지는 넘쳐 잃고야 마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하면서 내가 돈으로 행복할 수 없고 돈으로 내 가치 실현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쳤다.  내가 사회에 봉사하는데 필요한 것과 나라는 존재가 담을 수 있는 그릇은 돈이 아니라 그 다른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 본연의 모습을 찾아가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앞으로 살아온 날 보다 살 날이 적게 남아있는 내가 걸어갈 길은 무엇인가, 내가 무엇을 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의 해답을 갈구했다.

 

가장 먼저 고등 학교 때 연주했던 트럼펫을 샀다. 육군사관학교를 가기 바랬던 아버지를 실망시키고 트럼펫 전공으로 음대를 갔던 탓에 아버지와 갈등의 시간을 견디지 못해 중퇴하고 일반 대학에 진학했던 별로 좋지 않은 기억 탓인지 트럼펫은 거의 연주할 기회가 없어 거실 한 켠에 처박아 두었다. 어느 날 역시 그라지에 처박힌 먼지가 수북이 쌓이고 기타 줄 위에 파란 녹이 슨 기타가 눈에 들어왔다. 목이 휘고 겨울철 습기와 여름철 더위에 변형이 된 울림통은 이미 기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여 도저히 연주할 수 있는 상태였다. 기타 센터에 가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연주하는데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는 그 순간에 기타를 처음 배우던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군인에서, 건설회사 직원, 월간지 편집인, 건축 사업가를 거쳐 음악인으로 돌아오는데 30년의 세월이 걸렸다.

 

평범한 아이들이 다 그랬듯이 나의 초등학교 생활 기록부의 나의 희망 직업은 대통령, 대장이었다. 야구를 했던 중학교 때는 운동선수였고 책을 많이 읽은 고등 1학년 때 작가였지만 고3이 되어서야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내 고집대로 음대를 갔지만 아버지의 차가운  눈총에 굴복하여 트럼펫을 내 던지고 가출했던 것이 30년 방황을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2회 통기타 축제의 서막은 회원들의 기타 연주에 맞춰 '밤하늘의 멜로디' 라는 트럼펫 연주를 하고 싶다. 일반 대학 진학 후 형제 중 나를 가장 아끼고 신임하고 당신의 뒤를 이어 관직에 등용하기 바랬던 아버지의 뜻을 알아버린 후에도 난 음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넘어져 쓰러져 좌절할 때 마다 나를 세워준 것은 어떤 절대자의 권위와 가식과 위선에 사로잡힌 교목도 아니었고 가족도 친구도 아니었다. 나를 깨워 준 음악이었다. 나로 다시 태어나게 해 준 것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꿈틀거리고 마침내 용트림 하면 터져 나온 나의 열정에 불을 당긴 음악이었다.

 

미흡한 내 기타 실력을 보완하려고 프로 무대에서 오랜 동안 연주하고 미국 영화의 주제곡을 작곡하고 연주한 기타리스트를 찾아갔다. 한 눈에 봐도 그는 예술가였지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스목샵 주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했듯이 그는 당장 생계에 그 화려한 연주 솜씨를 썩히고 출연료 없는 모 단체의 초청에 한 번 응하기 위해서 최근에 구입했다는 기타를 꺼내 연주하면서 내 속에 숨어있는 또 하나의  열정을 끄집어 냈고 난 그의 제자가 되기로 했다.

 

음악을 직업이 아닌 취미로 하는 나 같은 아마츄어 음악인에도 많은 제자가 있다. 어린 아이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가지고 있고 특히 중년들은 그 동안 잡지 못한 기타를 다시 잡으며 추억에 빠지고 마냥 행복하다. 지난 몇 년째 쌓아 놓은 장장 45일간의 휴가를 받아놓고 한 달 여행을 가자고 조르는 아내와 가니 마니 실랑이 하면서 떠오른 '남자가 아내가 두려울 때, 제하의 유머가 있다.

 

남자가  아내가 두려울 때를 나이별로 보자면 20:외박하고 들어갔을 때, 30:카드 빚 독촉장 날라왔을 때, 40:아내가 샤워할 때, 50:아내가 곰국 끓일 때 (34일 여행 떠날까 봐) 60:해외여행을 가자고 할 때 (떼어놓고 올까 봐) 70:이사 간다고 할 때(가는 곳도 알리지 않고, 놔두고 갈까 봐).

 

한 편 미국보다 먼저 여자 대통령이 탄생한 한국에 가부장적 권위가 흔들리는 요즘에 한가지 더 생각 나는 유모 한가지 더 소개한다. 유모의 배경은 어느 병원에 아내에게 맞아 치료를 받으러 온 남편들이 함께 모여 신세 타령을 하는 장면이다.

 

40대 남편: 나는 어제밤 술 먹고 들어와 아침에 와이프에게 해장국 끓여 달라고 했다가 이렇게 되었지 뭡니까. 50대 남편: 나는 어젯밤 친구들과 계모임에 간 아내에게 어디냐고 물었다고, 언제 오냐고 전화 했다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60대 남편: 나는 외출 준비 중인 아내에게 어디 가냐고 물었다가 이렇게 되었답니다. 70대 남편:나는 해장국 끓여 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친구들과 계모임에 간 아내에게 어디냐고 묻지도 않았고 외출 준비 중인 아내에게 어디 가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눈앞에서 얼씬거린다고 이렇게 되었답니다. 80대 남편: 나는 아침에 해장국 끓여 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친구들과 계 모임에 간 아내에게 어디냐고 전화도 하지 않았고, 외출 준비중인 아내에게 어디 가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아침 눈뜨고 있다고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 맞았습니다.   

 

역시도 폭소가 터져 나오는 건 중년 남자들의 비애(?)를 절절이 느끼게 때문일 것이다. 돈 되지도 않는, 아니 오히려 내 주머니 돈을 써가며 모임을 주관하고 일주일에 3일 이상을  비영리 공연과 강습을 하는 나 역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을 안겨주는 음악에 대해 깊은 성찰과 이해가 없는 아내의 눈치를 봐가며 살얼음판(?) 음악생활을 한다. 어제도 귀가 약속시간을 넘기면 어김없이 걸려오는 아내의 전화 벨소리를 못 들은 척 강의에 열중하는 겁 대가리 상실한 배짱이 가능한 것은, 똘망 똘망한 눈빛으로 내 강의에 열중하는 분들이 현재 느끼고 있는 행복과 열정을 난 이미 느꼈고 익히 알고 있으며,  그들의 희망을 깰 자신이 없는 가운데 일종의 사회적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찬 바람으로 상기된 얼굴과 곱은 손을 불어가며 연주하는 멤버들 노래 소리에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지나가는 행인들, 아예 발길을 멈추고 관객이 되어 환호하는 분들과, 소아암 어린이를 도울 기부함에 부모의 인도대로 작은 정성을 보태는 어린 아이의 고사리 손을 보면서 가슴이 벅차옴을 느낀다. 연말의 비영리 단체의 크고 작은 연말 초청 공연, 소아암 환자 후원 거리 공연과 기타 강습으로 아내보다 기타를 더 어루만진 겁 대가리 상실한 중년 남성은 성탄절을 맞이하여 성가대도 찬양대도 없는 작고 가난한 교회들을 찾아가기 위해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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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팬더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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