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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객 송창식님을 좋아하는 사람들
평론&기사

B01. [다시 살아난 중년의 열정] 신문사기고칼럼 '편집본'

by 팬더54 2015. 1. 24.

원글:  김시우(시애틀7080 기타 동호회)

편집:  호주 통사모 컨보이

출처:  호주 통사모

 

[추억의 7080 음악 여행]
<다시 살아난 중년의 열정> - 글/김시우(시애틀7080)



 

 

 

 



[1]


"농부는 죽더라도 자신의 씨앗을 베고 죽는다"(農夫 餓死 沈厥種子)는 말이 있다. 얼핏 어리석고 인색한 사람이 죽으면 재물도 소용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절망 속에서도 끝까지 책임을 다 한다는, 집념과 책임의 가치를 강조한 속담(俗談)이다.


자유영혼의 천재 뮤지션 송창식은 “세상의 나쁜 것은 다 좋은 것”이라고 했다. 모진 세상의 풍파를 온 몸으로 이겨 낸 자조(自照)의 말이다. 그는 아버지가 한국 전쟁에서 숨지고 어머니는 가출을 하여 조손(祖孫)가정에서 어렵게 자랐다. 음악뿐 아니라 공부에도 천재성을 타고 났지만 그의 가난은 그 창조성을 담보하지 못했다. 결국 가난으로 인한 고교중퇴, 떠돌이 생활, 공사판 경비를 하면서도 그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신념을 꺾지는 못했다.


살면서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절망, 절박, 절실함을 빗대어 목숨 줄을 놓아 버릴 만큼 분노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음악은 그런 순간에 태어나기도 한다. 나와 함께 음악 모임을 꾸려가는 사람들 겉으로 여유가 있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회원 중 백만장자부터 한 달 한 달 생계를 이어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 보면 사람은 모두 '거기서 거기'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2]


송창식은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아버지가 한국 전쟁에 나가 숨지고 어머니가 집을 나가는 바람에 누이동생과 함께 할아버지 밑에서 어렵게 생활했지만 음악에 대해서는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동네에서 나오는 소리란 소리는 다 듣고 따라 불렀다. 초등학교 전 과정 음악교과서는 입학도 하기 전에 모두 섭렵했다.


" 초등학교 4학년 책부터는 콩나물 대가리 밑에 계명이 쓰여 있어
  도미솔솔 하며 부르다 보니까 음계를 저절로 알게 됐다”
는 게 그의 회고다.



아무에게도 배우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때 이미 악보를 읽고 채보를 할 수 있었던 것이 가능해졌다. 그는 인천중을 졸업하고 서울예고에 입학했다. 지휘자가 되는 게 꿈이었으니 작곡과를 가고 싶었지만 작곡은 별도로 레슨을 받지 않고는 진학하기 힘들어 성악과를 선택한 후에 음악이 공부라는 것을 깨우쳤다고 한다.


문제는 돈이었다. 당시 서울예고는 학생이 각자 개인 레슨을 받고 그 레슨교사의 추천을 받아 학기말 실기시험을 보는 제도를 시행했다. 보통 가정에서 하는 레슨비가 1만원일 때 학교 레슨교사의 교습비는 1천원으로 상대적으로 저렴했지만 인천에서 서울까지 다닐 통학비가 없어 학교 창고에서 잠을 청하던 그로서는 이 돈을 마련할 수 없어 실기시험은 계속 0점이었다. 3학년이 되자 학교는 유급문제로 상의할 게 있다며 가정통지문을 보냈는데 이를 본 송창식은 말없이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후에 송창식은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닥치는 대로 살았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책을 훔쳐 헌책방에서 음악책이랑 바꿔보는 등 음악에 대한 열정은 놓지 않았다. 40일간 무전 여행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 살아서 뭐가 되겠나" 하고 절망할 때 "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을 새기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무의도에서 1개월간 생각을 정리하고 서울로 돌아와 공사판 야간 경비를 했다. 낮에는 홍익대 다니는 친구들을 만나러 놀러 가곤 했는데 그때 기타를 친구들에게 기타를 배웠다. 고등학교 때 배운 기초 음악 이론을 바탕으로 빨리 배웠다.



 

 

 

 

 


[3]


홍대 잔디밭에서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어느 날 대학생들이 모여서 노래를 부르던 세시봉 카페의 이상벽씨가 세시봉 주인 아들을 데려와 인사를 시키더니 홍대 대표로 나오라고 권유를 받았다. 얼떨결에 가짜 대학생이 된 송창식은 그렇게 공사판에서 무대로 자리를 옮기게 된 것이다. 당시 세시봉에서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은 모두 명문대생이었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위축될 만도 하건만 그는 보통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자신감을 가졌다고 한다.


그가 어느 매체에서 인터뷰한 것을 옮겨본다.


“그런 것은 없었어요. 그때도 무게는 늘 나에게 있었으니까요.
 저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16년 배우는 게 2년치 공부거리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요.
 서울 음대에서 4년 배운 거, 내가 공부한 것보다 반도 안 되는 거예요.”


 


대학 문턱은커녕 고교를 정상적으로 마치지도 못한 그가 어떻게 이런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까. 노숙자 생활을 3년 하면서 명상테크닉을 터득한 덕분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선뜻 납득하기 어렵지만 송창식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려면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바로 이것이 내 음악 인생에 혼란을 가져오는 시점에서 그들 선택한 이유다.


“사람이 추운 날 밖에서 자려면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숨을 작고 길게 들이마시고 내쉬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추우니까요. 그런데 그걸 한참 하다 보니 상상도 못한 일이 생겼어요.
 우리가 컴퓨터에 8이라고 치면 숫자 8이 그대로 입력되는 게 아니라 다른 기호로 기억되는데
 컴퓨터 운영체계가 8이라 보여주잖아요. 우리 영육(靈肉)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라고 말하면 두뇌에 찍 금 하나 그어지는 건데, 몸의 운영체계에 의해 ‘아버지’라 나오는 거죠.
 영육이 같은 체계가 아니면 언어가 안 통합니다. 그런데 명상을 하면 그 소통법이 생겨요.
 어느 순간 지식이 몸 속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뭔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전혀 생각지 못한
 방법이 나오는 거예요. 처음에는 내가 머리가 좋아서 그런가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전혀 배우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4]


난 아직도 전술한 그의 회고가 피부에 닿지 않아 고통스러울 지경이다. 가짜 대학생이라고 스스로 말해버리고 스스로 명상 소통법을 깨우쳤으니 학벌 좋은 친구들이 오히려 가소로워 보였을 것이고, 명문대 학생이라고 해서 선망의 눈초리로 볼 턱이 없다. 이렇게 보면 세시봉의 맡형인 조영남이 당시 송창식을 가리켜 “정체불명의 대화 불통 상대”였다고 한 말이 이해가 간다.


이때 익혔다는 명상테크닉은 송창식의 음악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가 트윈 폴리오 때의 팝송을 버리고 전혀 다른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 게 이 명상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음악인이기 이전에 철학자라고 서두에 지칭한 이유다. 그의 인생과 노래 속에는 우리들의 지난 과거와 추억들이 고스란히 녹아있으며, 노래 한 곡 한 곡마다 깊은 철학과 사상이 담겨져 있다. 지독하리만큼 노력파이지만 태생적으로 천재적인 음악성까지 타고난 덕에 그의 음악적인 완성도는 가히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그는 틈틈히 작곡한 2천 여 곡을 세상에 내 놓지 않고 있다. 아직 완성이 안되었다는 이유에서다.


그가 공연을 하지 않는 이유는 마음에 드는 밴드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편 혼자 통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는 공연도 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에 노래에 비해 기타 실력이 형편없기 때문이라고 하니, 세시봉 그룹 중에 유일하게 3핑거링 주법을 연주하는 그의 주법을 따라 공부했던 나는 혼란스럽기 그지 없다. 유행가처럼 잊혀진 일부 가수조차 내면을 들춰내면 나름 상당한 자부심과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가왕(歌王)의 칭호를 받는 조용필을 대적한 유일한 사람으로 지목되는 송창식같은 거장의 내면은 파고 들면 들수록 알듯 말듯 오리무중인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에 대한 자료를 준비하면서 내가 초,중,고교 시절 교과서 만큼 위인전과 교양서적을 많이 읽었고 대학시절과 지금까지도 한 달에 한 권 이상 각 분야의 책을 읽는다고 해서 꽤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단 것이 부끄러웠고, 가끔은 음악 인생에 대한 지루함과 회의도 느끼는 평범한 나 같은 사람이 그를 이해하는 것도 힘들데, 그에 대한 충분한 연구없이 이같이 글을 쓴다는 것은 만용이고 그에 대한 모독인 지도 모른다.


외국에는 이미 대중음악가에 대한 음악적, 사회적 연구를 체계화시켜 학문으로 발전시킨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비틀즈 학'은 이미 '비톨로지'라는 이름으로 전문화된 지 오래고, 마돈나의 경우 그녀 자체가 하나의 학과목으로 정해져 있는 대학도 있을 정도이다. 이는 현대 문화계에서 대중문화의 비중이 날로 커지고 있고, 대중 스타는 그 당시 사회의 산물이자 특정 장르가 아닌 대중문화와 미디어의 유기적인 관계에 의한 결과물임을 생각해 봤을 때 당연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 특유의 연예인 경시풍조로 인해 이런 시도는 아직 우리나라에서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부터 <송창식학 개론> 이란 대학 교재를 저술한다는 각오로 그를 연구할 것이다. 그런 연구 결과로 천재성을 타고났지만 자만하지 않으며 오로지 노래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그의 인생 여정을 따라잡고 그의 그림자만 밟는 것만으도 영광이겠다. 칼럼 마감일을 하루 남기고 서재에 들어가 책상에 앉기 전 창문의 커튼을 열어 젖히니 바람 때문에 나뭇잎에 비가 머물 시간이 없이 떨어지고 있다.


지루하고 긴 시애틀의 겨울이 이어지고 있다. 차라리 눈이라도 왔으면 겨울 분위기에 젖어 토요일 거리 캐롤 공연만이라도 기분이 날 텐데 쓸쓸한 가을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비만 추적거린다. 대학 시절 같은 음악 서클에서 활동했던 친구들이 내년 봄에 나를 보러 시애틀에 들린다는 연락을 받고 마음이 설레는 오늘은 송창식처럼 그 친구들과 함께 캠퍼스에서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막걸리 기울이면서 입에 거품을 물고 주절댔던 개똥 철학조차 그리워지는 날이다.



[5]


앞서말한 가왕 조용필을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송창식은 제자리에서 맴도는 그 만의 운동 방법으로 건강을 지킨다고 한다. 조용필이 가요 대상을 싹쓸이 한 후 더 이상 가수상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자신의 길을 갔듯이 송창식도 그 이후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과감하고 실험적인 음반과 작품을 발표했다.


<토함산> <가나다라> <에이야홍 술래잡기>와 같은 곡들은 전통음악에 대한 고민을 담아낸 곡으로, 김민기가 제시했던 전통음악의 현대화라는 화두를 김민기보다 높은 수준에서 보여줌으로써 한국 퓨전음악의 선구자가 되었다. 송창식은 또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975년 <왜 불러>로 가요계의 정상을 계속 유지했고 1975년 말 연예계 대마초 사건으로 인기가수들이 초토화된 가요계에도 살아남아 1976년 말에도 양대 방송국의 가요상을 받음으로써 살아남은 자의 영광을 누렸다. 그와 동시에 <사랑이야> <슬픈 얼굴 짓지 말아요> <우리는> <푸르른 날> 등 대중성과 음악성을 동시에 갖춘 작품으로 대중들의 사랑도 놓치지 않았다. <담배가게 아가씨>는 블루스, 국악, 대중음악의 어법이 그의 특유의 해학성 높은 가사와 어우러져 천의무봉(天衣無縫)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송창식의 작업실 한구석에도 오래된 LP판들과 줄이 끊어진 통기타가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송창식은 퇴촌의 집에서 구리 작업실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퇴근을 한다. 송창식이 작업실에 도착하는 시간은 저녁 8~9시다. 아침에 출근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한창 활동할 때는 통행금지 시간 이후 밤늦게 노래하고 작곡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게 습관이 돼서 지금까지 낮과 밤을 거꾸로 살고 있다고 한다.


저녁에 작업실에 도착해 3시간 정도 연습을 하고, 다시 퇴촌의 집으로 돌아가 이것저것 하다가 아침 6시나 돼서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그의 기상시간은 오후 2시. 일어나서 화장실에 앉아 책을 보고,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저녁 6시경에 집에서 나와 다시 구리의 작업실로 향한다고 한다. 난 이런 그의 일반적이지 못한 일상으로 결혼생활이 가능한지 과연 결혼은 했는지, 했다면 그 결혼생활이 지속이 될 수 있는지, 그렇지 않아도 독신주의자를 자처했던 그였기에 현재의 그의 결혼 생활이 궁금해졌다.



 

 

 




1977년 무렵 30살이었던 그가 어느 날 느닷없이 연인을 공개하고 결혼 선언까지 했다.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그 때의 그 여인은 나이가 한 살 아래인 서울 예고 동기 동창 한성숙이었다. 학교 졸업 후는 서로 인연이 없었다. 송창식은 음악과를 다녔고 한성숙은 미술과를 거쳐 우석대 메이퀸 출신인데 서로 만나지 않고 지내다가 우연히 연말 모임에서 만나 그 자리에서 결혼을 약속했다고 하니 보통 인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 때 송창식은 어떤 기자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


"작년(1976년) 12월 25일 저녁 <그대 있음에>의 쫑파티(송별연) 때
 어떤 역술인 할머니가 나에게 그랬어요. 당신 장가 안 간다는 것은 거짓말이야.
 금년 안에 결혼 상대를 만나겠는데 바로 결혼하겠구먼 하고 큰소리를 쳤어요."


 


새해까지 남은 날짜가 6일인데 믿을 수 없어서 허허 웃고 말았다는 송창식. 그런데 그게 바로 족집게 예언이었다. 그로부터 6일 후인 12월 31일 밤 동창모임에서 그는 우연히 한성숙을 만나 그 자리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15일 뒤 부산에 사는 색시 어른들을 찾아가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결혼 승낙을 받는 과정에서 송창식의 행동도 기발했다. 술 한 병 차고 들어가 넙죽 큰 절을 올리고는 ‘따님과 결혼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하고 간청을 하자 어리둥절한 예비신부 아버지는 ‘언제부터 사귄 건지 모르지만 너무 빠르지 않느냐’고 답했다. 이때 나온 사윗감의 응답이 걸작이었다. ‘좋은 남편 노릇은 못할지 모르지만 좋은 사위 노릇은 하겠습니다’라고 했다는데 어쨌든 사업가로 통이 넓었던 신부 아버지는 기꺼이 송창식을 받아들였고 한다.


이처럼 그는 음악 생활은 물론이고 평상시 생활에도 그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의 시선에 송창식은 이렇게 항의(?) 했다. " 다른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과 하찮은 일이 제게는 그저 똑같은 일이거든요. 만약 방송 출연 섭외가 왔는데 친구와 선약이 있잖아요. 그럼 섭외 PD에게 ‘친구랑 약속이 있다’고 거절하거든요. 그럼 주위 사람들이 난리가 나요. 친구는 나중에 만나고 방송을 먼저 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요. 하지만 저한테는 세상 사는 일 중에 특별히 중요한 일이란 건 없어요. 그저 누가 먼저 약속을 했느냐가 중요하지.......”




 


[6]


돈’에 대한 개념 역시 그를 ‘기인’으로 불리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그에게 ‘돈’이란 그저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 쓰는 문제일 뿐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 많은 돈을 벌고 싶지도 않다. 사람들은 그에게 가난하다고 하지만, 정작 그는 “한 번도 돈이 모자라거나 가난했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사는 데 꼭 필요한 부분에서 돈이 없다면 불편하겠지만 집 있고 차 있고 입을 옷과 먹을 게 있는데 더 필요한 게 뭐냐는 것이다. 음악을 하는 데 필요한 좋은 기타도 돈이 있으면 구입하지만, 만약 돈이 없다면 갖고 싶어 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것.


그는 한평생 ‘소유욕’이란 걸 모르고 살아왔다고 한다. 내가 웬만한 승용차 값에 버금가는 꿈에도 갖고 싶었던 Martin D-40 기타를 사기 위해 "기타가 몇 개인데 또 사냐? 차라리 그 돈을 차를 바꾸라"고 했던 아내의 성화를 잠재우고 결국 손에 넣었던 일을 생각하면 프로 가수임에도 나와, 아니 일반 사람들과 사뭇 다른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그를 제대로 알고 그의 공연 실황을 보니 늘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해탈의 모습이 읽어낼 수가 있었다.


그는 한평생 집 한 칸도 없이 살다가 이사 다니기 귀찮아서, 생애 처음으로 경기도 퇴촌에 집을 지어 정착했다. 방송에 출연했을 때는 물 위에 집을 지었다고 알려져 ‘수상가옥’이라는 소문이 났지만, 개울 옆에 집을 지었을 뿐이다. 아내가 물을 좋아해서 개울가에 집을 짓게 된 것이라는데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도 엿볼 수 있다.


사랑에는 기인 송창식에게도 비범하지 않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 트레이드마크인 송창식. S 방송 프로그램에서 L사회자가 그에게 “화는 낼 줄 아세요? 누군가와 싸움을 해본 적은 있으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송창식은 “전 화를 낼 때 굉장히 열심히(?) 화를 냅니다. 열심히 화내지 않으면, 상대방이 제가 화가 났다는 걸 모르니까요. 다만, 제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없을 정도로 화를 내지는 않아요." 라는 의외의 답변을 했다.


또 그는 ‘포커 페이스’에도 능하다고 했다. 웃으면서 화를 낼 수도 있고, 슬픈 걸 웃음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고. 웃는 얼굴이기 때문일까. 고단하고 힘들었던 생활고에도, 그는 평탄한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6·25전쟁 때 빈털터리로 거리에 나선 후, 가난에 찌든 고달픈 삶이 계속됐고, 노래를 시작하기 전까지 3년 동안 노숙을 하기도 했다는 송창식의 고뇌를 찾아볼 수가 없다. 돈이 없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하여 공사판을 전전하고 무전 여행을 했던 송창식은 그때 그 시절이 그냥 좋은 추억 같다고 한다.


빈털터리 노숙 생활을 회상하며 “죽도록 힘들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할 법도 한데, 송창식은 그저 인생의 한 시절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정도로 편하게 이야기한다. 이런 그의 무던한 성격은 웃으면서 살아온 내공 덕분일 것이다. 40년의 긴 세월 동안 돈과 명예에 대한 소유욕을 모두 ‘음악’에 대한 열정과 맞바꾼 듯한 그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여전히 행복해지는 이유는 웬만해선 닮을 수 없는 그의 삶에서 나오는 듯하다.  


송창식의 음악 인생과 철학을 짚어보면서 음악은 가식 없는 진실과 순수한 열정을 가진 사람에게 거짓말하지 않고 그 꿈을 열어준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음악은 그 숭고함과 고마움을 아는 자를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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