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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객 송 창식님을 사랑하는 홈페이지
임진모 가요계 큰별과의 인터뷰 모음집 발간 [속보, 연예] 2004년 03월 29일 (월) 15:09 [스포츠서울] “대가들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씨(45)가 최근 발간한 인터뷰 모음집 ‘우리 대중음악의 큰별들’(민미디어 출간)을 집필하기 위해 가요계의 톱스타들을 모두 만나본 뒤 느낀 소감이다. ‘우리 대중음악의 큰별들’은 지난 2002년 7월부터 1년5개월 동안 시사 월간지 신동아와 음악전문지 오이뮤직에 게재됐던 글들을 엮은 책이다. 신중현 패티김 한대수 양희은 등 한국 가요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음악인들 26명의 인터뷰가 수록됐다. 임씨의 뇌리에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은 ‘가왕(歌王)’ 조용필. 지난해 8월 데뷔 35주년 공연을 앞두고 서울 강남의 작업실에서 만..
한국일보 1991년 5월 11일 문화인 / 예술인 - 가수 송 창 식 한국전쟁 직전, 어린 송창식이 없어지면 어머니는 늘 라디오소리 나는 곳에서 그를 찾곤했다. 결국 송창식(44)은 라디오뿐 아니라 TV, 대학캠퍼스, 술집 어디에서건 자신의 소리를 울려내는 남달리 유명한 가수가 되었다. 부침이 심하고 명이 짧은 대중가수들의 세계에서 그는 20여년을 꿋꿋이 버텨왔으며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들으면서 송창식이란 이름석자를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떠올릴수 있게 되었다. 독특하게 구축된 그의 음악세계는 특정계층의 감정 촉발을 강요하지않는 포괄적 성향을 보였고 대중가요들이 심심찮게 휘말려 들어갔던 저급, 퇴폐, 매판성 시비로부터 자유로울수 있었다. 75년 순전히 [러브송]으로 작사작곡,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 삽입했..
>문화 > 한국일보 2003년 9월7일 형이 날 노래의 길로 이끌었죠 양희은(51)은 송창식(57)을 아직도 창식이 형이라고 부른다. “처음부터 그냥 형이라고 불렀어요. 그 때는 그랬죠. 피붙이도 아닌데,오빠는 무슨 오빠”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에게 송창식은 오빠 이상이다. “내가 노래할 수 있게 해 준 사람이니까요.” 유난히 남자 선배가 많은그가 송창식을 첫번째 인연으로 꼽은 이유이기도 하다. 1971년 초, 재수 끝에 서강대에 입학한 양희은은 절박했다. 어머니의 빚보증 때문에 하루 아침에 가세가 기울었다. 버스비조차 없어 걸어 다녀야할 판이었다. 돈을 벌어야 했다. 무작정 통기타를 들고 명동의 ‘금수강산’에서 노래하던 송창식을 찾아갔다. “형, 나 노래 좀 하고 싶은데요.” “왜?” “돈이 필요해요.”..
1969년 10월 15일(수) 예정시각 11시45분 보다 30분 늦은 12시15분 김포공항 하늘에 JAL기는 서서히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드디어 공항에 대기하고 있었던 팬들은 탑승객 거의 마지막으로 트랩을 내리는 클리프를 보았다. 짙은 북청색 상의와 엷은 회색바탕에 짙은 회색 줄이 그어진 바지차림의 산뜻한 복장을 하고 미소를 띈 클리프 첫인상은 그 동안 영화와 사진을 통해서 보았을 때 느껴진 왠지 동양적일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아! 서양 사람이구나!였다. 실제 그의 모습은 눈이 훨씬 더 컸고 코도 사진보다 훨씬 더 오똑했다. 국빈 예우로 맞아준 한국일보와 팬들의 열렬한 환영에 감사한다고 하며 한국에 대해서는 일본 방문 때 들었다고 살며시 귀뜸해 주었다. 매니저 데이빗 브라이스는 한국이 매우 작은 줄 ..
하나의 결이 되어 -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2002-07-26 10:32:00 AM 70년대의 젊음과 80년대의 원숙 84.1 팝 칼럼리스트/이해성 송창식,윤형주, ['90 하나의결CD1] 09 Try To Remember 60년을 헤아리는 한국 가요사상 가장 건강한 음악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70년대 이른바 청년문화를 표방했던 포그 뮤직 지향의 젊은 자작곡 세대의 등장이었다. 매스 미디어를 통해 소개되었던 포크 뮤직은 단일한 한 장르의음악처럼 단순화되어 소개되었지만 실제로는 서로 성격과 스타일이 다른 아티스트들이 뒤엉켜 있었다. 어쿠스틱 기타(통 기타) 반주로 옛 민요 멜로디에 새로운가사를 붙이거나 새로 작곡한 민요적 멜로디에 기존 사회의 병리현상을 풍자하는 가사를 붙여 노래했던 이른바..
요기싸르의 시인 김지하 상생(相生)의 화두를 찾아서 15호. 2003. 여름 추억의 치열함 조성택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평소에 선생님을 사진에서만 뵈어 왔습니다만, 제가 오랜 기간 외국에서 생활하다 보니 가끔씩 한국의 토종 얼굴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송창식 씨, 차범근 씨, 그리고 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르곤 했죠. “아, 이 세 얼굴들이야말로 한국의 토종 얼굴이다!” 생각했던 것인데, 오늘 선생님을 뵙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김지하 허허,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송창식 씨는 우리 장모님(소설가 박경리)이 무척 좋아하세요. 조성택 이제 일산에 오신 지도 제법 되시지 않았습니까? 김지하 벌써 한 9년 가까이 된 것 같아요. 원주를 떠난 것은 제법 오래 됐지요. 해남을 간 것이 언제였..
[굿피플] 입양아 키우는 '사랑의 가객' 송창식 2/15/2004 70~80년대, 지금의 40~50대가 젊은 시절 가장 열광하던 가수가 송창식이었다. 그는 그냥 대중가수가 아니라 노래하는 시인이었으며, 그 시절 대변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었다.. 그때 함께 고래잡으로 떠나던 우리의 우상, 영원한 통기타맨 송창식(57)이 두명의 입양아를 키우며 초야에 묻혀 살고 있다. 과거 청바지에 통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하던 송창식이 언제부턴가 개량한복 차림에 경기도 퇴촌 한마을에서 도인(道人)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가요계에 꽤 알려진 이야기다. 그러나 친자식까지 있는 사람이 두 아이를 입양한 사연은 무엇일까. 송창식에게는 지난 77년 결혼한 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올해 27세의 아들 결군이 있다.그리고 23세 된 딸..
GQ KOREA 2003년 5월 조영남의 "진짜" 가수론 우리가 이 태생적인 리버럴리스트를 만난 것은, 미국 동서부를 잇는 순회공연을 막 끝내고 돌아온 그가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도 못한 어느날 오후였다. 뉴욕, 워싱턴, 라이베이거스, 보스턴 등에서 각각 러닝타임 3시간의 공연을 흡족하게 치른 그는, 이번 공연이 자신의 생애에 기록될 '베스트' 공연들이었다고 스스럼없이 밝혔다. 그는 "가수생활을 열심히 한 것도 아닌데, 너무 환영해준 탓에 스스로를 되돌아볼 기회가 되기도 했다"는 소감도 덧붙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떻게 3시간의 솔로 공연이 가능하느냐"는 질문에, "그러기 위해선 한 가지 스타일로 노래하면 안 된다. 그것은 내가 일찌감치 70년대부터 익혀둔 노래에 대한 노하우가 발휘된 거라고 생각한..
제목 : 국내외 나환우들을 돕기 위한 제21회 자선음악회 "그대있음에" 일정 : 2003년 5월 16일(금) 19시30분 장소 :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가격 : R석 70,000원 / S석 30,000원 / A석 20,000원 / B석 10,000원 예매처 : 티켓링크 1588-7890 07-송창식 골든1 04.그대있음에 국내외 나환우들을 돕기 위한 제21회 자선음악회 “그대 있음에” The Charity Concert for the Hansen's Disease Patients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나환우들을 돕고자 라자로 돕기회에서 시작한 자선 음악회 “그대 있음에”가 올해로 21회를 맞이하여 오는 5월 16일 오후 7:30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무대를 마련한다. 자선음악회 “그대 있음에”는 나..
불우했던 70년대 청년문화의 '불쏘시개' '윤형주와 트윈폴리오를 이루어 서울 명동의 쉘부르에서 노래할 때만 해도 가수는 노래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1969년 미국에서 한대수가 귀국하면서 모든 것은 바뀌었다. 가수가 스스로 노래를 만들어야 되는 시대가 불쑥 시작된 것이다. 나는 서울예고에서 음악을 전공했지만 작품을 써 본 적은 없었다. 처절한 습작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70년 솔로 1집에 담겨있는 단 하나의 자작곡 '창밖에는 비오고요'가 나의 첫 작품이다.' 조용필과 견줄 수 있는 단 한 명의 가객 송창식. 그가 운명적으로 싱어송라이트가 된 사연은 이랬다. 하지만 산맥과 같은 무게를 지닌 이 도도한 거장의 첫 걸음은 차라리 순박한 것에 가까웠다. 68년 번안곡 꾸러미를 안고 트윈폴리오라는 듀엣..